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문단 편집) === 로마군 역대 최강의 병졸 === 이름만 놓고 보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혹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가이우스(통칭 : 칼리굴라)]]에게 자유 혹은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어 시민권을 얻은 로마인 같다. 이 부분 연구를 한 역사가 베넷의 설명에서도 통상적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오스티아 항구를 만들며, 피해를 입은 선주 및 제국 동부의 교사, 지역유지들에게 시민권을 주면서 이를 받게 된 사람과 그 후손이 여기에 속한다. 거의 대부분 수혜자들이 그리스어 교육 종사자, 무역상, 건설 담당자, 퇴역 해군, 고대 폴리스 시절부터 내려온 그리스 귀족 가문이 많았다. 따라서 [[헤로데스 아티쿠스]], [[폼페이아누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프로쿨루스]] 등 그리스계 로마인의 전체 이름에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서 몇 가지를 조합한 이름이 많이 보인다. 서기 2세기, 3세기 동부 출신 그리스 혈통 로마 귀족, 기사계급들이 거의 대부분 이때 이 혜택 아래에서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은 경우가 많았고, 이를 기반으로 막강한 경제력에 기반해 로마 중앙 정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 집권기부터 로마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따라서 그들의 후손 및 친척들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절부터는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의 두 아들처럼 성씨 개념으로 쓴 클라우디우스를 넣거나 빼거나, 그나이우스 클라우디우스 세베루스 일가처럼 프라이노멘을 처가 쪽의 것과 조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보여, 클라우디우스를 후대부터는 개인이름처럼 사용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3대 황제 칼리굴라의 할머니,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 및 그녀의 언니인 대 안토니아(5대 황제 [[네로]]의 할머니)와 이들 자매의 아버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서 자유를 얻어 로마시민권을 얻게 된 해방노예와 그 가족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도와준 협력자들의 후손이 여기에 해당된다. 대표적으로는 프리기아 지방의 고르디움이 연고지였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상 및 [[네로]]의 모후 [[소 아그리피나]]의 측근 팔라스가 있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 영향권에 편입된 제국 동부의 시리아, 아나톨리아 출신들이나, 도미티우스 씨족 출신 귀족 및 그들의 클리엔테스로 속주에 정착한 이들의 후손이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으로는 시리아 출신 아랍계 법학자 [[울피아누스]], 현재 알려지기로는 아마도 아카이아 출신일 확률이 높다는 [[아우렐리아누스]]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만,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경우에는 본명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이기 때문에 그 직계 조상이 속주에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 도미티우스 가문 평민 병사일 확률이 높아,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 확률이 농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티투스 플라비우스"[*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로마시민권을 받은 그리스인 자유민 후손, 게르마니아와 판노니아 출신 보조병의 후손이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직접 로마 시민권 및 클리엔텔라 관계 설정 후 이름 일부를 받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유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 등의 로마인이 여기에 속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누스 칙령 조치 이후의 자유민과 그 후손들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프로부스]] 등 서기 3세기 이후의 로마인들이 많았다.] 등을 앞에 붙여 사용한 속주 출신 로마인들은 거진 본인 일가에게 자유 혹은 시민권을 준 파트로누스의 "개인이름+씨족성씨명"을 본인들의 본래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고, 이는 [[모스 마이오룸]]을 상식으로 여긴 로마에서 당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베넷이 지적했듯이, 막시미누스는 이런 로마의 고유명사학 사례의 전형으로 불린 동시대의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와 달리, 기원전 700년부터 서기 3, 4세기까지 유지된 이런 틀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런 배경적 특징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오직 본인의 노력, 실력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은 1세대 로마 시민임에도 원로원, 로마인 모두 진정한 로마인이나 정상적인 [[클리엔텔라]] 의무 아래에서 로마인이 된 케이스가 아닌 반(半) 야만인으로 간주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막시미누스의 출신은 혈통, 고향, 성장 배경 모두 로마 사회에서 가장 낮았다. 제국의 모든 자유민 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로마인이 된 사람들보다 낮았다. 그는 여러 고대기록과 현대 연구 모두에서 설명하듯이, 고향은 [[트라키아]], 출신 민족은 트라키아 지방에서도 반야만족 취급을 하던 스키타이-사르마티아[*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혹은 트라키아의 토착 민족인 게테족이다. 이는 동시대 사람으로 관료이기도 했던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이므로 사실일 확률이 높다. 다만, 믿을 수 없는 사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막시미누스는 트라키아 혹은 모이시아에서 [[고트족]] 아버지와 일리리아계 로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후자의 주장은 일찌감치 고트족 연구자들과 게르만족 연구에 힘을 쏟은 근대 서양 학자들이 여러 근거를 거론하면서 거짓으로 판명 받아, 일찌감치 '참고용' 사료로만 쓰이고 있다. 물론, 영국과 뉴질랜드의 저명한 로마사 권위자 로버트 사임은 4세기 당시 로마인들이 트라키아 게테족과 고트족을 비슷한 부류로 생각해 뭉뚱그려 표기한 경우가 있다는 점을 이유 삼아, 관습처럼 비슷한 부류의 야만족으로 보고 그리 적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버트 사임이 이렇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막시미누스의 출신 및 성장 배경 모두 로마인, 자유민 경계 모두에서 반(半) 자유민, 반(半) 야만인으로 평가된 것은 사실이었다. 게르만족들도 야만족이라고 취급한 사르마티아인이든, 아니면 트라키아의 게테족 출신이든 간에, 막시미누스 부모의 이름은 믹카, 아바바라는 게테족, 사르마티아인들의 언어에서 기원한 야만족 이름이었던 것은 이런 평가가 나온 배경 원인 중 하나였다. 즉, 어머니가 일리리아계 로마인이라고 해도, 부모 중 한쪽은 로마인, 속주 거주 자유민이 최소 아니라는 뜻이었기 때문에 로마시민권자 자녀, 속주 자유민 중 정상적인 세금이나 부역 등으로 지역에 기여한 로마 제국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이 사람의 별명 "트락스", "트라쿠스"와 관련된 트라키아 일대는 이 당시는 물론,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에 따라 시민권이 부여된 이후에도 변방의 대명사로 분류된 지방이다. 이 중 막시미누스가 태어나고 자랐다는 동북쪽 일대는 같은 트라키아 속주 내에서도 주민들에게 반야만족 취급을 받던 동네였다. 즉, 원로원과 이탈리아 지역 로마인들이 막시미누스를 반야만족 취급하면서 가짜 로마인이라고 여겼듯, 같은 트라키아 동네에서도 막시미누스는 출신과 혈통 모두 사회 끝자락 태생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막시미누스는 [[동로마 제국]] 시대의 조나라스 등의 기록까지 종합하면 서기 173년생임이 확인된다. 그는 당시 트라키아 속주에서 가장 발전이 더디고, 변방 중 변방 접경지로 평가된 트라키아 동북부 경계에서 태어났다. 이 동네에서도 최하층 태생 중 최하층 출신. 그것도 로마 제국의 변방 트라키아 국경 끄트머리에 사는 속주민 농부(양치기) 집안에서 태어난 뒤, 산야에서 목동으로 10대까지 로마의 정상적인 지배, 지역 유지와 주민들이 말하는 의무를 온전히 하지 않던 배경 아래 접경지를 오고 가는 자유민 출신이다. 쉽게 말하면 서기 2세기 말 로마 제국 안에 떠돌며 국경 변두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양치기 자유민 가족 출신으로, 반(半) 로마인과 반(半) 야만인 경계 모두에 해당되는 자유민이 막시미누스였다. 당연한 말인데, 막시미누스의 부모는 애당초 로마시민권을 가진 적도 없는 사람들이고, 친가와 외가 역시 비슷했다. 고향과 태어나고 자란 지역 역시 비슷했다. 트라키아 변경 중 끝자락이고 지명 이름도 불명확해 알 수 없고, 유년기를 함께 한 또래들 역시 모른다. 왜냐하면 변방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며 살던 부모 밑에서 양치기 생활을 한 까닭에 일정한 거주지도 없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원로원과 이탈리아 지역 로마인들은 물론, 같은 트라키아 동네와 그 근처의 발칸 출신 로마인, 속주민들에게도 막시미누스는 말 그대로 야만족 내지 반(半) 야만족으로 당연히 인식됐다. 그래서 후대 로마, 동로마 기록에서도 6세기의 동로마 관료 요르다네스는 막시미누스 생전의 동시대 로마에서 사용하지 않던 단어인 "Gothia"로 그를 설명하면서, 그가 어떤 위치의 신분이었는지 설명 중이다. 어떤 이름, 어떤 배경으로 살았는지 불분명하다. 그러다가 그는 야망있는 또래 속주민들이 그렇듯이 출세를 위해, 또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출신보다는 능력이 중시되는 로마군에 '''보조병으로 입대'''했다.[* 그러니까 시민권이 없었다는 말이다. 카라칼라 황제가 제국 내 모든 자유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전까지 로마 시민권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보조병으로 입대해서 만기전역하거나 또는 지휘관으로 진급해서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 다만 카라칼라 칙령이 반포된 시점에서는 이미 막시미누스는 로마 시민권을 받은 상태다. 카라칼라 칙령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막시미누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칸 반도 출신의 속주민,[* [[트라키아]] 문서 참조.] 또는 어쩌면 그 당시 로마인들이 말하는 '문명화된 야만족'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브렌트 쇼의 경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가리켜, 3~5세기 동안 집권한 발칸 반도 출신의 하층민 태생 로마 황제들[* 쇼는 리키니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다이아, 세베루스 2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레올루스, 레오 1세를 거론했다.]처럼 제국 서방과 동방 출신 로마인들에게 "야만족"이라고 인식된 황제라고 그를 평하면서, 그들처럼 군입대 역시 제국 안에서 시민권을 따고 성공하고자 그랬을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다만 함께 거론된 이들은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로마시민권을 가진 가정 출신이거나 태어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굳이 시민권을 얻고자, 군에 입대할 필요가 없었다. 즉, 그들과 비교해도 막시미누스는 이들과 달리 로마 사회에서 출발선이 다른 '야만족'이었다. 낮은 신분으로 입신양명하기 위해 입대한 그는 비록 헬라어(그리스어)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로마군의 공용어인 라틴어에조차도 지독하게 서툴렀지만, 젊은 시절부터 키가 8피트 6인치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 2미터 60센티미터.]로 체격도 매우 좋고 힘도 좋고 털털하고 친근한 성격에 호쾌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려 말과 달리기 시합을 해서 이기고, 엄지손가락이 어찌나 굵은지 귀부인의 팔찌를 반지로 써도 될 정도였으며, 마차 한 대쯤은 가볍게 맨손으로 끌었고, 주먹으로 말의 턱을 때리면 말의 이빨이 우수수 털려나왔다고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괴력과 강건한 신체를 지녔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또한 그냥 힘만 센게 아니라 [[항우]]나 [[여포]]처럼 그 힘을 응용한 무기술과 체술, 임기응변, 화술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친히 전방부대 시찰을 왔을 대 열린 군단 무투대회에 참가하여 손쉽게 보조병 소속 전종목 우승을 따냈지만 당시 로마군에서는 분란방지를 이유로 군단병과 보조병의 대련이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군단 최강의 칭호는 가지지 못한데 불만을 가지고 황제 앞에 나가서 군단병들과도 대결하게 해달라고 직소를 했다. 분명 일개 병졸이 최고 군통수권자앞에 나선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황제 자신이 보기에도 그 풍채가 매우 그럴싸해보였는지 특별히 예외를 적용해서 군단병과의 대결을 허락하였고, 결국 군단 최강의 칭호는 내로라 하는 군단병들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우승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돌아갔다. 그 무용이 맘에 든 황제는 그를 즉석에서 로마시민권을 주며 황제 직속 경호대원으로 스카웃했다. 그 뒤로 전투력을 인정받아서, 황제 경호대를 거쳐 다시 전방 군단에 백인대장으로 인사 이동했고, 이후 뛰어난 전투력과 야전 능력을 인정받아 카라칼라 시대 후기부터는 대대장까지 오르게 된다. 막시미누스는 이때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일대에서 주로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근무 생활 중 카라칼라가 암살되고 마크리누스를 거쳐, 세베루스 왕조가 재건된다. 그러다가 희대의 성애 중독 황제 [[엘라가발루스]]에게 갑자기 로마로 소환되어 "네가 그렇게 힘이 쩔어준다던데, 내 앞에서 여자 수십 명하고 밤새도록 하렘플레이 해보겠는지?" 이라는 성희롱을 듣고는 그대로 군대를 그만두고 귀농해버렸다. 그러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에 비슷한 사례로 군대를 떠난 옛 장교들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막시미누스 역시 군에 복귀한다. 이때 그는 비슷한 사례의 군인들과 비슷하게 그 전까지 근무했던 지역에 배속되는데, 최전방인 레누스[* 오늘날의 [[라인 강]]] 방어선의 신병교육대장으로 발령받았다. 전설적인 전투력과 경력과 인기와 인맥을 갖췄고, 나이가 당시 기준으로 고령인 점을 떠올리면, 신병 교육 및 실전 투입 모두 가능한 부분이 고려된 결과로 추정된다. 그래서 군단장은커녕 전투대대장으로도 진급하지 못한 채 신병교육대장에 그친 것은 그의 전략이나 행정보급 면에서의 능력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기에는 곤란하다는 평을 듣는다. 막시미누스가 맡은 당시의 제4 이탈리카 군단, 해당 군단의 신병 교육대장의 보직상 분명히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능력은 로마군 내에서 압도적이었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레누스 전선 전체의 신병 교육 및 실전 교육을 책임진 중책임에도, 실제 지위와 달리 일반적인 로마군 대대장들보다 그 활용이 제한적이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개인적인 능력은 전투 수행 부분 외에서는 내부적으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된 이유 역시 그렇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어와 군사학등 온갖 고급 교양지식을 필요로 하는 상류층 인텔리 보직인 대대장이 아닌 대대 백인대장 짬킹 정도의 입지에 가까웠다는 평 역시 사실이라는 이야기다. 제정시기 로마군에서 대대장의 업무는 기행 참모에 가깝고, 대대급 전투병력의 현장통솔은 대대 선임 백인대장이 담당했다. 어쨌든 라인강 군단의 신병들에겐 백발이 되도록 나이를 먹고도 훈련장에서는 그 무한한 체력으로 혈기왕성하게 덤벼오는 신병들을 모조리 레슬링으로 쓰러뜨리면서도 내무생활 간에는 성격 털털하고 출신 안 따지는 대부 혹은 큰형님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에게 교육받은 후 자대배치 받고 복무중이었던 레누스 일대 군단병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동시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막시미누스는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으로, 레누스에서 신병들이 대거 배치되어 훈련과 실전을 병행한 제4 이탈리카 군단의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까지 교관으로 뛰면서 병사들의 인기가 대단한 탓에,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돈으로 평화를 샀다는 소문이 퍼져 반란이 일어났을 때, 라인 강 방어선의 군단병들 입에서 차기 황제로 언급됐다. 이때 막시미누스를 적극 지지한 병사들은 게르마니아와 모군티아쿰을 군단기지로 삼고 있던 제22 데이오타리아나 군단[*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로 이어지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4대'를 적극 지지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도,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대한 충성이 대단했던 부대다. 따라서 칼리굴라의 게르마니아 전투, 클라우디우스의 전선 시찰 등에도 적극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앞장섰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가 네로를 끝으로 단절될 때, 네로가 대 드루수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와 그 외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살해하고 능욕했다는 이유로 충성을 거절해 네로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게르마니아 일대 주력부대이기도 하다.]이었다고 하며, 그가 몸을 담고 있던 제4 이탈리카 군단 등 게르마니아 일대의 레누스 부대들과 동방에서 지원차 합세한 부대들까지 힘을 보탰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막시미누스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황제로 추대됐다. 이때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와 별로 인연이 없던 본국 이탈리아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까지도 막시미누스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